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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스크랩] 한국의 팝 아티스트 이동기...

by 삭소롬 2008. 5. 29.

동기의 그림에서 눈 여겨 볼만한 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어떠한 이미지를 선택해 그것들을 '그린다'라는 것이다. '그린다'라는 것은 하등 신기할 것이 없는 행위이지만, 이동기 작품의 경우에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 지점은 남다르다. 그가 그리는 대상으로 선택한 이미지들은 거의 모두 대량으로 복제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복제되어 만들어지는 것들의 갯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자본주의의 원리에 비추어볼 때 이동기가 그려내는 대상들은 그 무엇 하나 눈 여겨 볼만한 것이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값싼 것들, 싸구려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키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곧 키치적이라고 규정되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있다. 그의 작품은 확연한 키치처럼 보기에는 확 드러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그가 대단히 정성을 들인 솜씨로 그것들을 '그려내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성을 다해 '그려진' 진짜 키치들도 알고 있고, 대량으로 '찍어' 낸다거나 아무렇게나 '골라'낸 것들이 미술사의 적자로 판정된 수많은 경우들도 알고 있기에, 그린다는 것이 곧 반()키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동기의 작품이 온전히 키치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려지는 대상과 그리는 행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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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택하는 이미지들은 붓을 쥐고 그려내기에는 부적합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만화 컷을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려내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복제의 방법을 그는 의도적으로 멀리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렸다는 ''를 내기 위해 일부러 면을 다 메우지 않는다거나 의외의 붓질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그린다는 행위는 똑같이 그린다는 것을 목표로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불가피하게 대상을 각색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 각색의 과정은 이동기에게 있어서는 대상을 의미화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내면화의 과정은 전통적인 '그리기'의 방식을 놓지 않는 것 이외에도, 이미지들을 선택하고 다루는 방법들과 그가 미술사적 맥락에서 참고하는 지점들에서도 보여진다. 요컨대 그는 키치적인 감성으로 이미지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키치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작가들과는 달리 궁극적인 자신의 작품에서 아우라를 떨쳐버릴 생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의외로 화랑 공간에 잘 어울리고, 자본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프로페셔널의 면모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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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택하는 이미지들은 만화와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각 이미지들이다. 그는 대학 재학 시에 '수업과는 별 상관없이' 만화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고, 최초의 만화 이미지 작품으로 '아기 공룡 둘리' 중에 나오는 둘리와 희동이의 모습을 다소 표현적인 붓질로 그려낸 바 있다. 갈등의 모습이 역력한 이 작품 이후에 만화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됨과 동시에 익히 잘 알려진 친근한 이미지들, 이를테면 TV 프로그램 소개난이나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그릴 심적 자유를 얻게 된다.
  
그의 작품을 몇 개의 이미지 군으로 묶자면

) 기존의 만화 이미지를 확대해서 베낀 것, ) 스스로 창출한 만화 캐릭터를 그린 것(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 그리고 어딘가에서 본 듯도 하고 처음 본 것 같기도 한 남자와 여자의 이미지들), ) 만화 이미지 이외에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 이미지 등을 확대하여 그린 것(알려진 인물들의 초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호들, 신문의 TV 프로그램, 광고난 이미지 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존의 만화 컷을 베낀 작품들은 원래의 만화 속 문맥을 탈각한 상태로, 또한 어떠한 양식적인 통일성도 없는 상태로 제시되어진다. 말하자면 소녀들이 즐겨 보는 스포츠 만화와, 사랑이 주된 소재인 순정 만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명랑만화들 중 알 수 없는 어떤 대목에서 알 수 없는 어떤 이미지들이 차출되어 뒤섞인 채로 보여지는 것이다.

만화는 그 어떤 추상적인 형식을 뛴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이들이 택하는 수단이며, 그 속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는 무용과 무용수와 관계처럼 뗄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잃어버렸을 때 그 한 컷 한 컷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처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답답하게 제한된 무엇이다.
  
작가가 특정한 이미지를 선택할 때의 심리 상태를 알 길이 없는 관객으로서는 선택할 때의 심리 상태를 알 길이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것들이 그저 회고 취향의 일단인지, 혹은 모종의 의미가 부여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모호한 와중에서도 이야기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그가 이야기 전달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일련의 모티프들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화의 기호들 중에서 자동차가 부딪칠 때, 주먹으로 상대를 때릴 때, 야구 배트에 공이 맞을 때, 통틀어서 어떤 급격한 상황의 전이가 일어날 때 그려지는 놀람의 표시가 있는데, 이는 이동기가 선택하는 만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며, 이 기호만을 그린 것도 몇 점이 된다. 그가 최초로 만화 이미지를 사용해 그렸던 작품들 중에는 미키마우스가 어떤 괴한으로부터 총을 맞고(총이 발사될 때 이 놀람의 기호가 사용된다) 빨간 피로 화면을 물들이는 명확한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는 작품이 있는데, 손을 내저으며 쩔쩔 매는 미키의 애절한 모습은 디즈니사의 미키마우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하튼 어떠한 맥락에서이든 폭력이 가해지는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사하게 반복되는 이미지들 중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모티프는 돈과 관련된 것인데, 이는 아토마우스와 달러, , 그리고 원화의 기호를 합성한 일련의 작품들이나, 돼지저금통, 수표를 확대해 그린 것 등에서 볼 수 있다. 요컨대 산만하게 여기저기서 이미지를 끌어내 오지만 그것들의 배후를 관통하는 관심의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미지 자체가 이야기인 만화의 태생적인 강렬함을 그는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고정적인 해석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두고 있다. 특정한 관심사가 엿보인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가지는 모호함의 지점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토마우스에 이르면 이미지의 선택은, 선택해서 합치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이된다.

아토마우스는 아직도 진화 중인 것처럼 얼굴이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아톰의 삐죽한 머리와 몇 개의 동그라미로 완성되는 미키의 얼굴이 합쳐지는 지점은 너무나 명확해서 그것은 그야말로 확정된 캐릭터이다. 그러나 외면이 명확할 뿐, 우리는 불안하게도 그 이미지가 가지는 성격의 특성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아토마우스는 지독히도 낯익으면서 낯설어서, 고전적 만화 주인공들이 가진 꿈과 용기, 아름답고 정의롭고 밝은 모든 가치들은 그 인물 속에서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것은 만화의 주인공들이 원래의 스토리에서 빠져 나와 현실과 만나는 자리이면서 얽히고 흔들리고 꿈틀대며 균열하는 자리이기도 한다.   
  
모호하게 흔들리는 가치의 창출은 그의 전략이다. 그의 작품들 중 드물게 메시지가 강력하게 드러난 대립쌍의 이면화들에서 이동기는 이분법적인 가치에 대한 의심의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준 바 있다. 이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 오른쪽과 왼쪽, 땅과 하늘, 마이너스와 플러스 등의 의심하기 어려운 이항대립의 관념들이 이미지화되어 쌍을 이루어 놓여졌을 때 그것은 대립적이기보다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것들의 묶음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더할 수 없이 명확한 이미지들이 그의 눈과 손을 거치면 모호한 존재가 된다는 바로 그 점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원리이다. 탈주범 신창원이건 십만원권 수표건 그는 세상에 널린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그려내며, 그러는 중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깨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치열하게 삶을 관통하고자 하는 자의 태도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노는'것에 가깝다. 그가 줄기차게 대상으로 하는 이미지들이 도저한 의식으로 무장하고 꼬나보아야 보이는 삼차원의 현실 이미지가 아니라, 보면 볼수록 보고 싶어지는, 의미로 가득찬 이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상의 명확한 의미들을 '가지고 노는' 자가 던지는 유희의 기표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기표들은 주위를 배회하는 무수한 기의들과 조우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화가라는 것은 어쩌면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낭만주의적으로 피를 토하고 살을 깎으며 그림에 임할 수도 있겠고, 계몽적인 전투성을 가지고 작품을 담금질하는 자도 있겠으나, 어느 쪽이든 '놀이'의 성격이 빠지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단계 재미가 덜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동기의 작업은 하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보며 놀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정하는 측면이 있다. 그의 눈을 통해 관람자는 엄청난 물량의 대중 매체 이미지들을 가볍게 향유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착실한 이미지 수집을 통해 세상의 이해에 새로운 길을 뚫는 작가의 게임의 법칙은 가볍지 않다.

 





















출처 : 한국의 팝 아티스트 이동기...
글쓴이 : JAMES 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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